Monday, May 4, 2009

순종 Obedience


순종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시고 우리의 복종을 기대하신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어리석은 일을 요구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지적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쉐럴 포드



요즘, 자꾸만 '순종'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떠올랐습니다. '순종'에 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서른 중반을 훌쩍 뛰어넘어 이제 40대로 달려가고 있는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완전한 순종'을 해본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깜짝 놀라며, 내가 그렇게 순종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내 육신의 부모에게까지도 완전한 순종을 해보지 않은 '나'. 비록 '완전한 반항'을 해본적은 없었으나... 그냥 그럭저럭 큰 말썽이나 사회적인 무리,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며 '착하게' 사는 것이 '옳은'것인 줄만 알고 살아왔었더랬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어쩌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고 나름 성경구절의 써포트를 받아가며 안심해왔었습니다.

돌이켜보니... 결국 나는 지금까지 '순종'이란것 자체를 모른체 내가 하고 싶은데로, 내멋대로 살아왔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팍팍하시거나 비이성적이신 분이 아니야'하면서 나의 안일하고 게으른 삶을 합리화 시켜왔었습니다. 나는 지금 나의 상황이 늦동이 외아들 이삭을 제단에서 찢어 죽여야 할뻔 했던 아브라함의 상황보다 더 nonsence하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입니까? 아니면, 정말 아무런 잘못없이, 받지 말아야 할 온갖 모함과 수치를 온 몸에 입으시고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예수 그리스도. 그가 관통해야 했던 그 고통의 시간들 보다 지금의 내 상황이 더 고통스럽고 말도 안되는 상황이라고...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입니까?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예수님...' 제가 그런 예수님의 순종을 따를 수 있을까요. 제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을까요... 순종이란 것이 마치 나의 선택에 달려 있는것 같이 보일때가 많지만... 지금 제가 깨닫게 되는 것은,순종이 나의 선택에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막다른 외길 이었다는 것. 이 길 이외에는 내가 갈수 있는 곳이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 이것 입니다.


Thursday, April 23, 2009

용서를 구하는 기도

(Image from http://rodneymullins.wordpress.com)

당신과 닮게 하는 당신의 모든 선물 가운데 가장 당신의 모습을 지닌 것은 제가 누구든지 용서할 수 있는 힘과 악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을 지녔다는 것, 이것입니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죄에 걸려 넘어진 저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당신에게서 때로는 남들에게서 사랑 가득한 용서를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높다라니 앉아 형제, 자매를 판단하고 있는 저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가리려 하는 저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당신은 제가 짐짓 화가 나지 않은 척 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저의 분노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제가 감정을 부인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제게 용서를 바라십니다. 제 자신을 용서 받았기에...... 한 없이 관대하게 용서 받았기에......

저희가 짐승보다 우월함은 여기, 용서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는 장소는 여기,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곳입니다. 용서하며 화해하는 사랑이 저희가 진정 누구인가를 보여줍니다. 당신께 청하오니 제게 고통을 준 바로 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상처보다 더 강한 사랑을 제게 주옵소서. 그리하여 저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용서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해 주옵소서.

(by 조만나스 신부)


Tuesday, April 14, 2009

무제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는 문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여실 수 있다.
열쇠를 가진 이는 그리스도뿐이다.
모든 상황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때가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문이 더욱 활짝 열리는 때다.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문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오직 영적인 눈으로만 우리 앞에 열린 하나님의 문을 볼 수 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스티브 로슨


그러나 주님 ... 때로는 이렇게 저항할 수 없이 옳은 말씀이... 저를 더욱 두렵게 만들고,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제가 믿음이 없는 것일까요...? 제안에 "의심"(Doubt)이 들어온 것일까요...? 아버지여... 저를 붙잡아 주시고, 저를 도우소서...


Wednesday, March 25, 2009

Life of the Beloved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독서를 하기 좋게 거실의 구조를 살짝 바꾼 이후에 혼자 흔들의자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무슨 책을 읽을지를 고민하다가 읽기 시작한 책. 그냥 제목이 좋아서 집어들었는데, 알고보니 헨리 나우엔의 책이었다. 지난달에 읽었던 탕자의 귀향헨리 나우엔의 글이었는데... 거참, 이게 무신 조화람...하면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사실 제목도 제목이지만, 이책이 아주 마음에 쏙~ 들었던 점은 손쉽게 휴대하기 좋도록 디자인된 사이즈와 하루나 이틀정도면 쉽게 읽어낼 수 있겠다.는 편안함을 주는, 그 얇은 두께였다.


이 책은 헨리 나우엔과 한 비기독교인과의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우연한 만남은 진정한 '우정'으로 발전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 친구로부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헨리 나우엔)이 진정으로 해주고 싶은 말들을 써달라'는 요청으로 인해 헨리 나우엔은 이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헨리 나우엔은 그의 진심과 우정을 담아 그 친구에게 개인적으로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빌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가 꼭~ 전해주고 싶은 말들을 적어내려간다.

나는 헨리 나우엔이 가장 처음으로 전해 주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을까 매우 궁금했다. 헨리 나우엔은 "사랑받는 자"라는 단어를 선택한다. 그는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3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이 말씀이 바로 모든 인류를 향한 가장 깊은 진리, 곧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그의 글 속에서 표현한것 과 같이 '너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야, 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야. 라고 외치는 목소리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성철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기뻐하는 아들이란다."는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책 읽기를 멈추고, 몇 번이고 그 문단을 천천히 다시 읽어 내려갔다. 몇 번을 다시 읽었을까... 어느 순간인지 모르게 '이는 내 사랑하는 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 내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가 잠자고 있던 내 영혼의 귀에 대고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깨닫게 되었다.

헨리 나우엔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선택받은 자, 축복받은 자, 상처받은 자, 나누어 주는 자.의 모습으로 설명해나간다. 그리고 실체적인 고통과 내 실제적인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유혹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사랑받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주제로 그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사실 나는 늘 "고통의 문제"속에서 자유롭지 못해왔다. 내가 비록 마음이 울렁거리도록 짠한 '은혜'를 체험했었다 할 지라도, 내 삶의 구석구석에 언제나 존재하는, 나를 간단하게 산산조각 내버리는 고통의 파도에 나는 늘 압도 당해왔다. 때문에 내 맘속에는 뿌리깊은 패배의식이 있다. 바로 나를 압도하는 삶의 고통으로인한 패배의식.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내 자신의 불굴의 의지로도 극복하지 못해온 내 삶속 한구석에 자리잡아 버린 고통에 대한 패배의식 말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책의 마지막 장에 서술된 고통의 문제에 대한 헨리 나우엔의 깊은 묵상이 다시금 내 마음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이부분은 그의 묵상을 나의 언어로 다시 설명하는 것 보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는게 나을듯 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또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불가사의한 진리라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우리를 지으신 그 사랑에 우리가 반응하기를 기다리고 계시지. 하나님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라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시고 우리가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수 많은 기회를 만들어 주시지. 우리 내면의 진리에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기회,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삶이네...

...자네가 이러한 영적인 시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되면,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던 구분들이 그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을 걸세. 기쁨과 고통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에 대해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기회가 된다면, 고통과 기쁨이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슷한 것임을 알게 될 걸세. 상을 받는 경험과 우수하지 못함을 알게 되는 경험이 둘 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주장할 기회를 제공한다면, 이 경험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거의 같은 것이 되는 거지. 외로움과 편안함에 모두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을 더 잘 발견하게 하기 위한 부르심의 의미가 있다면, 이러한 감정은 별개의 감정으로 남아있지 않고 통합되네. 결국 사는 것과 죽는 것 둘 다가 온전한 영적 자아 실현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세상이 가르치는 것처럼 정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동일한 신비의 양면이 되는 것이지.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의 통합된 실재로서 살아간다는 말이네. 어둠의 세력은 나누고 분리하고 대적하게 만드는 반면, 빛의 세력은 하나를 이루게 한다네. '악마적인(diabolic)이란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나눈다는 것이지. 악마는 분리시키고, 성령님은 하나가 되게 한다네..."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처음 기대와는 다르게 점차 흥미와 동기를 잃어가는 책이 있는가 하면, 나도 모르게 책의 내용에 몰입되어 마치 글을 쓴 사람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듯 한 느낌을 주는 책이 있다. 헨리 나우엔의 글들을 읽고 있으면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의 글들은 무엇보다도 솔직 담백하다. 그의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그의 심장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진심"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진심이 전달될 때 사람의 마음은 움직인다.고 했던가. 헨리 나우엔의 글들은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딱딱하게 굳어 미동조차 하지 않던 나의 영혼에 코끝이 시려오는 미세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Mar, 2009

Monday, February 9, 2009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탕자의 귀향)


탕자의 귀향(헨리 나우왠)

늘 읽고 싶었던 책이었지만 어디로부터 오는지 모를 미묘한 '거부감' 때문에 나는 지난 몇년간 이 책의 표지만을 대충 훓어보고 있었다. 아마 그것은 내가 본래 책읽기를 즐겨하지 않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이 "꼭 읽어야할 위대한 기독교 서적"중 하나라고 손꼽는 이 책을 통해 내가 과연 실질적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하는 실체적인 의구심이 나를 감싸고 있었던 탓이기도 했고, 지난날 다른 이들의 추천에 의해 그냥 "읽어 버렸던", 그래서 "아~ 그 책. 나도 읽은 적 있어" 정도로 끝나버린, 지금은 제목도 내용도 기억나지 않은 책들 처럼 되어 버릴 거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날 우연히 교회 도서관에 비치된 이 책의 겉 표지에 있는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이 내 눈에 들어오면서 나는 나도 모를 힘에 이끌려 이 책의 책장을 넘겨가기 시작했다. 마치 그 힘은, 저자인 헨리 나우왠이 케나다에 있는 라쉐 공동체를 처음 방문했을때, 공동체 사무실에 걸려있던 이 그림의 포스터를 보고 느꼈던 신선한 충격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기전에 나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스트레스와 압박으로 가득차 있었고, 나의 이러한 아무에게도 말못할 고뇌를 한 없이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는 절대자의 위로와 사랑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책의 표지 그림에서 보았던, 돌아온 탕자(작은 아들)를 감싸안은 그 아버지의 모습이, 나로 하여금 나도 저 탕자와 같이 저 품에 안기고 싶다는 강한 바램을 품게했다. 그리고 저자 헨리 나우왠이 이 그림을 보고 느낀 영감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헨리 나우왠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셨던 이 돌아온 탕자의 예화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림을 그렸을 당시, 렘브란트가 처했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이 그림이 렘브란트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었는지, 그리고 그림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짚어 내려가면서 그 색감과, 텃치와, 인물의 표정과 풍만한 빛의 처리가 어떻게 헨리 나우왠에게 심오한 영적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는지 고백해간다. 그렇다. 이 책은 어떠한 교리와 논리에 입각한 한편의 서적이라기보다는, 어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깊고도, 잔잔한 신앙고백에 가깝게 느껴진다.

헨리 나우왠의 시선은 먼저, 아버지를 배신하고 먼길을 떠났다가 만신창이 누더기를 걸치고 돌아온 탕자(작은 아들)에게 향한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인자한 아버지의 조건이 없는 사랑과 포옹을 받아야할 영적인 탕자였음을 설득력 있게 고백한다. 계속된 그의 묵상은 이제 그림의 오른편에 지팡이를 두 손으로 꼭 쥐고 꼿꼿하게, 무표정하게 서있는 큰 아들에게로 넘어간다. 실제로 가정에서 큰 아들로 자랐고, 지금까지 한번도 교회를 떠난적이 없는, 그야말로 한결같은 모범생으로 평생을 살아온 헨리 나우왠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집을 나갔던 동생을 위하여 큰 잔치가 열리자, 그것을 아버지의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편애라고 오해한 나머지, 분을 품고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큰 아들의 모습과 다를바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영적인 탐구의 끝자락에는 한 없이 인자하고, 두 아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늙은 아버지의 형상이 있다. 헨리 나우왠은 예수님의 돌아온 탕자의 예화의 궁극적인 메시는 우리의 모습이 마치 만신창이 탕자임과 동시에 분노에 차있는 큰 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우리 스스로가 탕자를 품어주시고 큰 아들을 위로하고 설득하는 인자하신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기대가 담겨 있다는 것으로, 그의 묵상을 마무리한다.

나는 헨리 나우왠의 묵상과 고백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마치 그의 영적 순래에 내가 동참하고 있었던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의 묵상과 고백이 바로 나의 묵상과 고백이기를 강하게 바랬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품고 있었던 모든 의구심들과 비관적인 생각들은 내 안에서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리고 내마음 속에 이런 소리가 계속하여 메아리 치는 것만 같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좀더 가까이..."









Monday, January 12, 2009

Daniel 1:17

"To these four young men God gave knowledge and understanding of all kinds of literature and learning. And Daniel could understand visions and dreams of all kinds."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모든 지식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늘 지각하게 하셔서, 작은 학문적 성취에 스스로 우쭐하지 말게 하옵시고,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 때문에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실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게 하옵소서.
온 우주의 지혜의 끊이지 않는 원천이신 하나님께 오늘도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와, 저에게 허락하신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제 일에 대한 열정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Tuesday, December 9, 2008

마더 테레사의 기도문


오 사랑의 주님,

존경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사랑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칭찬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명예로워지려는 욕망으로부터,
찬양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선택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인기를 끌려는 욕망으로부터,

모멸받는 두려움으로부터,
경멸맏는 두려움으로부터,
질책당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비난당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잊혀지는 두려움으로부터,
오류를 범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우스꽝스러워지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소서.

아멘.